
평소 두부처럼 부드럽던 간이 간경변을 일으키면 자갈밭처럼 변합니다. 어떤 요인들이 이처럼 간을 병들고 아프게 하는지, 그리고 그 예방과 치료법은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일 때 입니다.
어느 간경변 환자와의 만남
45세 남성 김 씨는 몇 주 전부터 이유 없이 배가 불러오는 증세로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이미 얼굴과 공막이 노랗게 변해 있었고 황달이 동반된 상태였습니다. 진찰해보니 간경변이었습니다. 환자는 군 입대 전 만성 B형 간염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고 무심코 지냈을 뿐 병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 씨와 동행한 노모는 옆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는 본인이 젊었을 때 만성 B형 간염이 있어 출산 시 아들에게 전염시켰다는 생각으로 평소에도 늘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모체감염(수직감염)은 90% 이상에서 거의 만성화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진료실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노모를 진정시키고 김 씨에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술은 얼마나 드셨나요?” 김 씨는 “10년 전부터 사업이 잘 안 풀리고 먹고 사는 게 팍팍해 매일 소주 한두 병씩…”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돌아오는 김 씨의 대답에 그저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간이 걱정되지 않으셨어요? 병원에 한번 오셨어야죠.” 걱정된 표정으로 던진 나의 말에 “B형 간염은 별다른 치료제가 없는 것 아닌가요? 약을 먹어도 치료가 안 된다고 해서요.” 김 씨의 답변에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간경변이란?
간경변은 손상된 간이 반흔조직으로 대치되어 딱딱해지는 현상입니다. 본래 정상간은 두부 같이 부드럽지만 병이 진행될수록 자갈밭처럼 결절이 생깁니다. 만성 바이러스 간염 등 다양한 원인(독성물질 사용, 과음)으로 인해 염증상태가 지속되면 점차 거칠어지고 종국에는 돌덩이처럼 단단해집니다.
일반적으로 손상 후 섬유조직이 과도하게 침착되는 단계(섬유화)를 먼저 거치는데, 이후 섬유화가 지속되면서 간조직의 왜곡과 혈류이상이 발생하고 재생결절로 바뀌면서 간경변이 진행됩니다.
초기 간경변은 이런 섬유화 조직이 혼재돼 있어 원인에 따른 적절한 치료 시 일부 조직이 정상으로 호전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치료시기를 놓쳤을 때입니다. 조기에 치료 기회를 놓치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데 의료진들 사이에서는 종종 그 지점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고 표현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조기 발견, 조기 치료는 만성 간염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라 할 수 있습니다.
소리 없이 찾아오는 간경변
간경변의 무서움을 짧게 말하면 ‘환자 본인이 간이 나빠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간질환이 그렇듯 처음에는 증세가 없다가 증상이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70% 이상의 간 손상) 비로소 고통을 호소합니다. 갑자기 증세가 시작되는 것이죠. 피곤감, 묵직한 우상복통, 구역, 식욕부진, 소화불량 증세가 느껴지지만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넘깁니다. 황달이나 복수 등의 심각한 증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저 조용한 침묵만 있을 뿐입니다. 웬만해서 간은 아프다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기 발견이 어렵습니다.
간경변의 진행
하지부종과 복수
간문맥은 내장혈관에서 흡수된 영양을 간조직에 전달하는 중요한 혈관입니다. 간경변이 생기면 간문맥과 작은 분지들이 간조직을 통과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정상적인 혈류 흐름에 저항이 생겨 ‘문맥 고혈압’이 발생합니다. 즉, 간 내부의 혈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고 간으로 들어오는 혈류의 정체가 일어납니다. 이는 진행성 간경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합병증의 근원입니다. 반대로 내장혈관은 오히려 확장되며 앞의 경우와 상반된 결과로 혈류량 증가, 혈압 감소가 생깁니다. 이런 모순적 상호관계는 과역동적혈류(Hyperdynamiccirculation)를 유발하며, 신장에서 나트륨 배설이 감소해 체내 나트륨 축적이 진행됩니다. 이때 간 기능 손상으로 알부민 합성 장애가 발생해 하지부종과 복수를 일으킵니다.
위, 식도 정맥류
간으로 모여드는 혈액 병목현상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혈관단락(Shunt)이 생기고 정상적인 혈류 경로 외에 다른 길이 생겨나는데 주로 근처 식도나 위로 가는 정맥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는 위식도 정맥류의 원인이 되고 혈액이 과도하게 몰려 압력 차가 심해지면 치명적 위장관 출혈을 일으키게 됩니다.
간성뇌증
간 기능이 떨어질수록 장관에서 올라오는 독성물질 해독 능력이 떨어지고 전신 혈관단락을 통해 혈중에 암모니아 같은 물질이 축적됩니다. 이는 신경조직에 독성으로 작용되어 혼수가 동반되는 간성뇌증을 일으킵니다. 이외에도 자발성 세균성 복막염, 간신증후군, 급성 간부전 같은 치명적 합병증이 동반되면 생존율 또한 떨어집니다. 난치성 복수 같은 중증합병증이 동반될 경우 5년 생존율이 50% 이하로 떨어지고 신기능 장애 및 감염이 동반되면 중앙생존율은 1년에 불과합니다.

간경변의 진단과 치료
간경변증은 혈액검사, 복부 초음파, 복부 단층촬영검사(CT) 등을 통해 진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간암의 위험인자로 간경변이 발생하면 정기적으로 간암 혈액 표지자 검사를 권합니다. 앞서 사례의 경우 김 씨는 간염 바이러스 표식자 및 간 기능을 포함한 혈액검사, 복부 초음파, 복부 단층촬영검사에서 만성 B형 간염과 복수를 동반한 비대상성 간경변으로 진단됐습니다.
간경변증은 어찌 보면 간암보다 더 고약한 병입니다. 환자는 반복되는 중증합병증에 시달리면서 매번 입·퇴원을 반복하고 만성적인 영양결핍으로 고통 받으며 간암이 동반될 위험도도 100배 이상 올라갑니다. 종국에는 간이식만이 유일한 치료가 됩니다. 따라서 만성 간염이나 초기 간경변 단계에서 병의 진행을 막거나 더디게 하는 적극적 치료가 필요합니다.
만성 간염에 걸리지 않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일단 어떤 종류의 만성 간염이든 질환이 발생했다면 간경변으로 진행되는 것을 차단해야 합니다. 만성 간염의 원인에 따른 적극적 치료가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만성 간염은 B형, C형 바이러스 간염입니다. 이외 알코올 간염, 비알코올 지방간염, 약인성 및 자가면역 만성 간염 같은 원인이 있습니다. 경구 항바이러스 치료제의 발전으로 이제 만성 B형 간염도 당뇨병, 고혈압처럼 활동성을 조절할 수 있는 질환이 됐고 치료시기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B형 간염에 의한 진행성 간경변과 그 합병증은 가까운 미래에 진료실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성 C형 간염 치료는 더 나아가 완치의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구용 직접 작용 약물(DAA; Direct Acting Agent) 출시로 부작용 많은 인터페론, 리바비린 병합치료를 대치할 예정입니다. 향후 C형 간염이란 단어는 백과사전에서나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약인성 간염은 원인이 되는 약물의 중단으로, 알코올 간염은 금주 및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치료가 중요합니다.
비알코올 지방간염은 체중 감량 및 운동, 식생활 개선 같은 생활습관 개선이 우선되어야 하며 아울러 새로운 약물 개발도 기대됩니다.
간경변증 예방
만성 간질환 치료는 빛과 같은 속도로 발전하는데 환자들의 인식 개선은 상대적으로 느립니다. 잘못된 의학 상식과 편견으로 민간요법이나 검증되지 않은 약물에 의존하는 환자를 대할 때면 늘 아쉽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최근 다양한 종류의 건강식품이 출시되고 있지만 아무리 좋은 약도 본인과 맞지 않으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간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전문의와 상담 후 복용할 것을 권합니다.

간경변과 동반하는 합병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관리뿐만 아니라 환자 교육과 홍보를 통한 인식 개선이 우선입니다. 무엇보다 간경변증이 간암의 주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간검사를 받고, 바이러스 보유상태를 확인해 간염 예방접종을 필수적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건강한 음주문화 및 생활습관 개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간경변은 주치의뿐만 아니라 환자 스스로도 같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질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