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4일은 정신건강의 날입니다. 정신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으로 치료받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968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제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숫자 사가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유사하여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단순 편견에 불과한 것처럼 정신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로 숫자 4가 두번나오는 4월 4일로 지정되었습니다. 금일은 정신건강의 날을 맞아 현대인의 정신건강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인생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는 사람은 시기에 따라 발달과 성취의 과제를 가지게 됩니다. 이는 사회·문화적 상황의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게 되며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 정신건강상의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인생의 시기에 따른 과제와 환경의 변화
첫돌 무렵의 유아에게 가장 큰 당면과제는 혼자서 잘 걷는 것입니다. 그러던 아이가 자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어갈 시기가 되면 부모와 떨어지는 분리불안을 극복하고 친구 사귀기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에 적응하는 것이 새로운 당면과제가 됩니다. 이렇듯 사람의 성장과 발달에 따라 인생에서의 과업이 달라집니다. 이는 동양 고전인 논어에서도 나타나는데요, 15세는 학문에 뜻을 두어야 하는 나이라는 의미에서 지학(志學)이라 칭하고, 40세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시기로 불혹(不惑)이라 했습니다. 동양과 서양에서 표현방식만 다를 뿐 공통된 관찰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시기에 따른 과제는 사회·문화적 상황의 영
향을 받게 되며, 외부 요인에 대한 적응상의 어려움을 겪을 경우 다양한 정신건강상의 곤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청소년기(10대) - 학업 성취율 저하로 인한 좌절과 우울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처한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듯이 학업과 입시문제입니다. 생활수준 향상으로 청소년의 체격은 훨씬 커졌지만, 자신의 관심영역에 따라 원하는 취미생활을 하는 등 시간을 자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여지는 과거에 비해 심각하게 줄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지만 다른 학생들도 모두가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기에 원하는 만큼의 성적을 성취하는 청소년은 소수에 불과하고 상당수는 좌절하게 됩니다.
사회적 경험이 많은 성인에게도 좌절은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입니다. 하물며 신체적 발달에 비해 자신의 감정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미숙한 청소년이 반복적인 좌절을 경험하면 우울증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청소년기에 우울증이 발생하면 스스로 우울하다는 감정적 표현을 하기보다는 부모나 학교에 대해 거부적이거나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충동적인 일탈행위를 하는 등 성인과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이를 바탕으로 필요 시에는 주저하지 말고 정신건강 전문의와 자녀에 대해 상담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TIP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우울하다는 감정호소보다는 다양한 행동상의 문제와 급격한 성적 저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성인기(20~30대) - 사회생활의 괴리와 능률 저하
초기 성인기라 부를 수 있는 이 시기의 당면과제는 부모로부터의 독립과 결혼입니다. 독립과 결혼을 위해서는 취업과 직장에서의 적응이 필수지만 이 또한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어렵게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상당수가 자신이 꿈꿔왔던 사회생활에서의 이상과 실제 수행하고 있는 업무 사이의 괴리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 질병으로 볼 수 있는 우울증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점차 자신이 맡은 업무에 대해 동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고, 조직문화 개선이나 업무에 적극적인 상사나 동료에 대해 ‘그래 봤자 뭐 달라질 게 있겠어?’라는 식의 냉소적 태도를 보이게 되며 업무능률도 떨어집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번아웃증후군(Burnout syndrome)이라 칭합니다. 번아웃증후군은 비교적 최근의 개념이며 의학적 진단기준에 따른 질병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되면 자신을 잘 이해해줄 수 있는 동료나 상사와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일과 생활의 균형(Work life balance) 정도를 점검해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나름의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지속된다면 직장인 정신건강문제에 정통한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TIP
20~30대 직장인이 번아웃증후군을 예방하려면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중장년기(40~50대) - 중년 남녀에게 다가오는 우울증
중장년기에 가장 흔하고 주의해야 할 정신건강문제는 단연 우울증입니다. 중장년기 우울증은 남녀에 따라 임상 증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성의 경우는 증상을 신체화하는 경우가 흔한 편입니다. 소화가 안 되고 머리가 아프며 가슴이 답답하다는 등의 애매한 신체 증상으로 내과, 가정의학과 등에서 이러저러한 검사를 받아보지만, 대개 검사결과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고 신경성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성은 우리나라의 문화적 배경상 우울증을 앓고 있더라도 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으며 대개는 무기력, 의욕저하를 호소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중장년기의 우울증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서 사회적 요인은 물론 성호르몬 저하 등 다양한 생물학적 요인과 결부되어 나타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우 항우울제 치료에 반응이 비교적 좋은 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적 환경상 여전히 존재하는 정신과 질병이나 치료에 대한 선입견과 거부감으로 인해 증상 발생 후 치료 시작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는 것이 실제 임상현장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아닐까 합니다
★TIP
중장년기의 우울증은 다양한 임상적 형태를 보이지만 대개 약물치료에 반응이 좋으므로 우울증이 의심될 때 치료를 빨리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년기(60대 이상) - 역할 상실과 고립이 불러오는 외로움
우리나라에서 노년 초기 정신건강문제 발생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신체적 연령과 사회적 연령의 불일치 입니다. 이제는 60대 이상을 노인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노인들의 건강상태는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개선됐지만 사회가 노인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의 수준은 매우 낮습니다. 신체적으로는 여전히 일할 수 있는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조기에 퇴직하면 역할 상실로 인한 우울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70대 이후 노인은 질병 및 노화에 따른 신체능력 저하로 괴로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아프다고 해서 모두 우울증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임상현장에서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살펴보면 대개 고립된 노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배우자의 사별 이후 남성노인의 기대여명이 단축된다는 보고가 있으며 이는 요리, 청소, 세탁 등 일상생활의 기본이 되는 부분을 부인에게 의존해왔던 남성노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2011년 기준 OECD 평균 10만 명당 11.2명, 우리나라 28.4명)를 차지한 이면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고립, 질병 등의 문제에 시달리는 70대 이상 노인층의 높은 자살률(10만 명당 80.3명)이 있습니다. 누구나 늙고 노인이 됩니다. 피할 수 없는 노년기를 편안하고 건강하게 맞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할 사람입니다.
★TIP
역할 상실과 고립이 노년기 정신건강문제의 주된 원인이므로 건강하게 늙기 위해서는 노년을 함께할 가족, 친지, 동료와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라는 믿음으로
필자는 대학병원 정신과 의사로서 괴롭고 힘든 상황에 처한 환자를 많이 만났습니다. 사람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가족과 친구, 동료들이 곁에 함께하면서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면 고통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살아가며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가 있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며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는 궁극적 힘이 되어주고 마침내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년기를 건강하고 현명하게 맞이하는 비결은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진심과 성의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