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30대 이상 인구의 12.4%인 약 400만 명이 앓고 있는 병. 환자 10명 중 3명은 자신이 걸린 줄도 모르고 있는 병. 발병 급증으로 2050년에는 환자 수가 약 6백만 명에 이르게 될 병. <대부>에서 노년이 된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에게 발작의 원인이 되는 등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 병은 바로 당뇨병이다. 흔하지만 가볍게 볼 수 없고, 미디어에서 자주 접하지만 그만큼 잘못된 사실도 많이 퍼져 있는 당뇨병에 대해 강북삼성병원 내분비내과 이원영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70년대 1.5%발병, 지금은 국민의 병
“1970년대 초반에만 해도 당뇨병 유병율은 1.5%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의대에 다니던 1980년대 후반에도 지금처럼 흔하지는 않았고요. 전공의가 되었을 때 환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임상강사가 되고 나니 급증하였지요.” 국내에서 당뇨병이 확산되는 상황을 의료 현장에서 체감해온 이원영 교수가 말한다.
이전부터 당뇨병에 대하여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던 이원영 교수는 국내에서 환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을 보며 치료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후 이 교수는 강북삼성병원 당뇨혈관센터에서 진료 해오며 당뇨병에 대한 전문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췌장의 췌도에서는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혈액 중의 포도당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당뇨병은 인슐린 분비량이 부족하거나 분비된 인슐린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생기는 질병으로, 포도당이 체내 세포로 적절하게 공급되지 못하고 혈중포도당 농도가 높아져서 ‘고혈당’ 증상과 함께 다양한 합병증을 동반한다. 고혈당의 정도가 약할 때에는 증상이 없어 병을 자각하기가 쉽지 않지만, 고혈당 상태가 장기간 계속 되면 실명을 하거나, 신장기능 저하로 투석이 필요할 수 있으며, 심혈관계질환의 발생위험도 높아지게 된다.
아시아인이 특히 취약, 비만일수록 위험
국제당뇨병연맹(International Diabetes Federation)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성인 인구의 8%가 넘는 약 3억8천만 명이 당뇨병을 앓고 있으며, 2035년에는 환자수가 5억 9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국내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의 당뇨병 환자 증가율은 서구를 압도한다.
“인도, 중국 등의 인구 대국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당뇨병이 늘고 있습니다.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운동량은 줄어들며 비만도가 높아진 것이 중요한 원인입니다.” 2007년 강북삼성병원 당뇨센터 설립을 기념하여 개최된 국제심포지엄에서 아시아인의 당뇨병 유병율에 대한 발표를 하기도 했던 이원영 교수가 말을 잇는다. “
뿐만 아니라 아시아인들, 특히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유전적으로 서구인들에 비해 인슐린 분비 기능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연령, 같은 체중의 서구인에 비해 아시아인들의 당뇨병 발병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거든요. 또한 체질량지수가 같아도 아시아인들은 서구 인들보다 체지방량이 많기 때문에 조금만 체중이 늘어도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집니다.”
이원영 교수는 특히 복부비만을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부 비만이 있거나 과체중인 경우 정상 체중의 사람들보다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2배 이상 높습니다. 복부비만이 있으면 인슐린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인슐린 저항성’이 생길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높은 유병율만큼 치료법 연구 활발
유병율이 높은 만큼 당뇨병은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치료법이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는 분야다. 이원영 교수는 오랜 당뇨병 진료를 통해 다양한 치료법과 약제에 대한 전문성을 다져왔다.
“인슐린 주사라는 획기적인 치료법이 개발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약제와 치료법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인슐린의 분비를 촉진하거나 인슐린 저항성을 약화 시키는 약제 개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최근에는 간과 신장 같은 다른 장기를 통해 증상을 치료하는 약제도 나오고 있어요. 종전의 췌도 이식, 췌장 이식에서 나아가 위나 소장을 수술하는 치료법도 시도되고 있고요.(베리아트릭 수술) 아직 실험적인 단계이고 제1형 당뇨병에 국한되어 적용할 수 있지만, 몸에 부착하여 규칙적으로 혈당을 측정하고 혈당이 높아질 경우 자동적으로 인슐린을 주입하는 기기의 효과가 보고되기도 하였습니다.” (sensor-augmented insulin pump therapy)
당뇨병은 환자에 따라 증상이 상이하기에 개인별로 적합한 치료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이원영 교수의 전문성과 풍부한 경험은 환자들이 가장 효율적인 당뇨병 치료법을 찾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특별한 교육프로그램, 강북삼성병원 당뇨혈관센터
의학적, 기술적 혁신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변함없이 치료의 기본이 되는 것은 식사요법과 운동요법, 약물요법 세 가지다. 이중 식사 요법과 운동요법은 환자 스스로 실천해야 하는 것들이다. 식사는 하루에 세 번 규칙적으로 해야 하고 과식은 금물이다. “체중과 활동량에 맞는 열량을 파악한 후 거기에 맞추어 6대 식품군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끼 열량을 계산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10%씩만 음식량을 줄여서 식사하라고 환자분들께 권고하고 있습니다. 과식도 위험하지만 지나친 소식, 육류는 무조건 피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우유, 채소, 과일 등을 매일 골고루 섭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균형 잡힌 식사와 더불어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운동 역시 당뇨병의 예방과 치료에 모두 핵심적이다.
환자들 입장에서는 막상 생활습관을 개선하려고 해도 정확하게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어야 할지, 운동은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할지 막연할 수도 있을 것. 강북삼성병원은 의료진과 더불어 영양사, 운동처방사, 당뇨병 전문 간호사 등이 환자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병원 당뇨병 교육프로그램은 국내 최고 수준입니다.
개인 맞춤교육은 물론 당뇨병 초기 진단자, 임신성 당뇨병 환자, 제1형 당뇨병 환자, 고지혈증 환자 등을 대상으로 특화된 교육을 하고 있으며, 향후 당뇨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당뇨병 전단계(전당뇨병) 환자를 위한 무료 교육프로그램도 개설되어 있습니다. 진단을 받으면 바로 상담과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환자 편의를 우선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도 우리 병원의 강점입니다.”
1편 쓰기도 힘든 SCI 논문 120편 발표
강북삼성병원 당뇨혈관센터는 2007년 당시 국내 최대 규모로 설립되었으며, 내분비내과는 물론 심장내과, 신장내과, 신경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안과 전문의가 참여하는 다학제협진을 통하여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진료는 물론연구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데, 센터의 주축 의료진 중 한 명인 이원영 교수 역시 당뇨병에 대한 오랜 경험과 탁월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120편 이상의 SCI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췌장에서 인슐린 분비를 담당하는 베타세포의 기능을 촉진하는 방법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와 한국인 당뇨병 환자의 향후 사망 및 암 발병 위험도를 확인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임상 쪽에서는 여러 가지 신약에 대한 임상시험에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고요.” 강북삼성병원 당뇨혈관센터는 최근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밴팅 베스트 당뇨병 센터’(BBDC: Banting& Best Diabetes Centre)와 기초 연구 활성화를 위한 공동 연구 협약을 맺기도 하였다. 토론토 대학 재임 중 인슐린을 처음 발견하고 당뇨
병 치료에 적용한 프레데릭밴팅과 찰스 베스트 박사의 이름을 딴 BBDC 는 세계 유수의 당뇨병 연구 기관. 앞으로 두 기관의 공동 연구를 통해 당뇨병 치료의 또 다른 혁신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환자 고통 이해 위해 인슐린 주사 1주일간 직접 체험
치료법은 날로 발전하고 좋은 교육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지만 정작 자각 증상이 없어 자신의 질병을 모르고 있거나, 진단을 받더라도 치료에는 소극적인 당뇨병 환자들이 많다고 한다. “생활습관 개선을 통해 상태가 많이 좋아질 수 있는데도 치료가 어렵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치료를 꺼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치료에 대한 두려움 중 대표적인 것이 인슐린 주사는 평생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당뇨병 초기 환자들은 고혈당이 심할 경우 인슐린 치료를 시작하다가 인슐린 분비능이 회복되면 주사 대신 경구약제로 치료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제2형 당뇨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슐린 분비능이 약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뇨병 병력이 오랜 환자들은 인슐린 주사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경구약제로 조절되지 않을 경우 인슐린 치료를 적극적으로 실시한다면 예후에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인슐린 주사를 맞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주사라고 하지만 펜 형태로 휴대할 수 있으며 바늘이 매우 가늘고 짧아서 실제 통증은 거의 없습니다.” 인슐린 주사를 맞는 환자들의 고충을 직접 경험해 보고자 주사기에 생리식염수를 넣고 직접 일주일간 시험 주사를 해본 이원영 교수의 체험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아서 인슐린 주사 치료를 설득하는 데 몇 개월에서 1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받는 치료보다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것도 이원영 교수가 염려하는 부분. “민간요법에 활용되는 약제들은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확인된 바 없습니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기능 악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로울 수 있습니다. 식사요법과 운동요법 등 기본적인 관리는 소홀히 하면서 건강식품에만 의지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기본을 지키는 것, 세계적으로 효과와 안전성이 검증된 표준치료법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30년 넘게 인슐린 주사 맞은 환자도 '건강 당뇨인' 선발
완치가 어려운 대신 당뇨병은 관리를 잘 하면 일상생활에 지장없이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병을 두려워하는 대신 병과 친구가 된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꾸준하게 관리하며 함께 가야 하는 대상이지요. 당뇨병 치료의 기본인 균형 잡힌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실천하다 보면 당뇨병 뿐만 아니라 심혈관질환과 암도 예방되고, 정신 건강에도 좋기 때문에 더 즐겁게,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환자들에게 당뇨 이후의 건강을 되찾아 준 이원영 교수가 그 중 한 명을 기억한다.“연세가 70이 넘은 환자분 한 분이 생각나요. 30년이 넘게 하루 세 번씩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혈당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활동적으로 생활하는 분이었지요. 당화혈색색소가 6% 내외 유지되어 인슐린 주사 횟수를 줄이면 어떻겠냐고 해도 괜찮다며 주사 습관을 유지하셨어요. 나중에 우리 병원에서 ‘건강당뇨인’으로 선발되시기도 했지요.”
이 교수가 국제적인 ‘건강당뇨인’의 예로 할리베리를 든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이자
많은 이들에게 당뇨병은 평생 꾸준한 관리를 통해 함께 가야 하는 병이고, 투병은 길고 힘든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런 환자들과 20년 이상을 함께 해왔기 때문일까. 이원영 교수는 “은퇴 후에도 진료를 멈추지 않고 평생 환자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한다. 거기에 더하여, 병보다는 사람을 먼저 본다는 마음으로 환자의 신뢰를 얻고, 연구를 통해 당뇨병 치료법의 혁신에 기여하는 것이 그가 의사로서 가지고 있는 바람이다. 당뇨병과 함께해야 할 긴 여정에 기꺼이 평생을 동참해주려는 의사가 있다면 당뇨병에 맞서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