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8월 28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과 교직원 등 250여 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정년을 맞은 교수들의 퇴임식이 열렸다. 평생을 교육과 연구에 헌신하고 명예롭게 은퇴를 맞은 의대교수 6인 중에는 인공와우이식과 외이도 재건술의 권위자인 의과대학 이비인후과 장선오 교수도 있었다.
대가에게 은퇴는 없다.
장선오 교수는 1974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후 평생을 진료실과 수술실에서 보내며 환자들의 청각 건강을 찾아주는데 매진해왔다. 700여명의 환자에게 인공와우를 이식하고 8,000명이 넘는 중이염 환자를 치료하는 한편, 국내에서 외이도 폐쇄증이라는 선천성 귀 기형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 중 절반을 수술해왔다. 또한 장 교수는 우리나라 초창기 청각학 연구를 선도해 온 주역이기도 하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많은 업적을 이루고 명실상부하게 대가의 경지에 오른 장선오 교수. 40여년을 환자를 돌보는 데 바쳤으니 이제는 정년 후의 여유로운 삶을 만끽해도 될 법하건만, 그는 여전히 환자를 만나고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이제는 강북삼성병원에서다.
서울대학교에서 퇴임식을 가진 3일 후, 9월 1일부터 강북삼성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며 의사 인생의 새로운 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정년 퇴임하긴 했지만, 아직도 기운이 넘쳐 보이지 않나요?” 퇴임 후 자리를 옮겨 진료를 계속하게 된 동기를 묻자 장선오 교수가 질문을 되받는다. 그의 말대로 장선오 교수는 정년을 지났다기에는 너무나 활기차 보였다. “평생 에너지를 100퍼센트 써가며 일했는데 정년이 되었다고 진료를 멈추고 싶지 않았지요.”
오랜 시간 다져 온 의술을 계속 펼치고 싶었던 것이 그의 바램이었고, 명성이 자자한 장 교수를 영입하고 싶어하는 병원도 여러 곳 있었다. 하지만 인공와우 이식 분야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던 강북삼성병원은 퇴임을 수 개월 앞둔 시점부터 장선오 교수의 영입을 추진했고, 장 교수의 새 터전이 될 수 있었다.
소리와 단절된 이들에게 듣는 능력을 전하는 인공와우 이식술
인공와우는 일종의 인공 달팽이관으로, 소리대신 소리 자극화된 전기신호로 청신경을 자극함으로써 뇌에서 소리를 인지하도록 하는 청각재활기기다. 인공와우 이식술은 선천적 장애나 후천적 난청으로 정상 청력을 상실한 환자에게 달팽이관을 대신할 인공와우를 이식하여 청력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는 수술.
달팽이관의 신경세포가 손상되어 보청기로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시도하게 된다. 수술 시간은 두 시간 정도이며, 약 4일간의 입원 후 재활 치료가 이어진다.

인공와우 이식술은 1988년 처음 국내 도입된 이래 현재까지 약 7,500건이 이루어졌다. 이중 장선오 교수가 집도한 것이 700건 이상이니 그가 국내 인공와우 분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인공와우 이식술이 세계적으로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에 오르기까지는 장선오 교수가 기여한 바도 크다.
인공와우 이식술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듣는 능력이 없는 어린 환자들이다. 소리를 통해 학습하고 언어 능력을 발달시켜야 하기에 어린이들에게 있어 인공와우 이식의 중요성은 더 크다.
장선오 교수가 인공와우 이식술이 활성화 되며 일어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공와우 덕에 농아를 위한 특수학교 과정이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유아반에서 시작해서 고교 과정까지 개설돼 있었던 것이 지금은 영아반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과정 중심으로 바뀌었죠. 이전에는 치료가 어려웠던 농아들이 인공와우 이식을 통해 정상청력을 회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듣지 못하던 어린이가 인공와우 이식술을 받을 경우에는 정상 청력을 갖추기까지는 후천적 이유로 난청이 생긴 성인환자들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유아들은 수술을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더라도 언어와 소리를 인지하는 기능은 신생아와 마찬가지 수준입니다. 태어나서 말을 배우기까지 걸리는 과정을 똑같이 거쳐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게 되지요.”
이식 이전까지 일체의 소리가 없던 세계에 살던 어린이가 갑작스럽게 외부의 소리에 접하고 적응하는 데에는 성인이 낯선 외국어를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인공와우 이식 후에도 청력의 회복 정도는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기기를 조율하는 매핑 과정과 꾸준한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 “특히 어린이 환자의 경우 수술 후 4년 정도는 정기적으로 경과를 지켜 보며 지속적인 언어 치료를 실시하게 됩니다.”장선오 교수는 와우 기형이 심했던 두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인공와우를 이식하여 처음 2년은 결과가 좋지 않다가 3년 후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수준으로 치료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다.

인공와우이식수술 후 언어 훈련을 하고 있는 소아
“처음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상태가 호전되어 나중에는 전화 통화까지 가능한 수준이 되었지요. 이렇게 소리와 단절된 세상에 살던 환자들에게 ‘듣는 즐거움’을 찾아주는 것이 제 일의 큰 보람입니다.”
인공와우이식 사례가 늘어나며 비용에 대한 부담도 줄었다. 2005년부터 이식 시술료가 전액 환자부담에서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환자 일부 부담으로 변경되었으며, 소아환자의 경우 지원 폭이 성인보다 훨씬 넓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본격적으로 하고 있는 곳은 아직 많지 않아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시술 중인 병원은 열곳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선오 교수가 주축이 되어 새롭게 문을 열 강북삼성병원 인공와우센터는 환자에게 또 다른 가능성과 희망을 전하게 될 것이다.
귀 기형을 바로 잡는 고난도의 수술: 외이도 재건술
인공와우와 더불어 장선오 교수가 독보적인 성과를 이룬 또 다른 분야는 외이도 폐쇄증 환자의 귀 재건술이다. 외이도 폐쇄증이란 쉽게 표현하자면 귓구멍이 없는 것으로, 주로 태아기에 발달에 문제가 있어 귀가 정상적인 형태를 갖지 못한 채 태어나는 귀기형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에 약 50명의 아이가 그런 상태로 태어난다고 한다. 외모상으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청력에 이상이 있을 경우 언어 능력, 발달에 장애가 오기에 뇌간유발반응검사, 행동관찰검사 등 다각적인 청력검사를 실시한 후 수술을 하게된다.
독일에서 외이 성형에 대해 연수를 받기도 한 장선오 교수는 국내에서 태어나는 외이도 폐쇄증 영아의 절반 정도를 수술해 왔고 이 분야에서 가장 풍부한 수술 경험과 연구 성과를 쌓아왔다. 뿐만 아니라 특정 외이 기형에 대한 수술방법을 개발한 경험도 있다. 때문에 장 교수가 강북삼성병원으로 옮긴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입소문이 퍼져 외이도 폐쇄증의 수술을 기다리는 대기자들이 밀려 있는 상태라고 한다.
“외이도 폐쇄증의 수술은 눈에 보이는 귀의 모양을 복원하는 외이 재건술과 청력을 개선하는 외이도재건술-고실성형술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귀에 관련한 수술 중에서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술기도 매우 까다로워 숙련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지난합니다.”이와 관련하여 장선오 교수는 최근 젊은 의료진들의 치료 경향에 대해 우려를 표현한다.
“수술로도 청력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에는 삽입형보청기를 시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외이도재건술과 고실성형술이 워낙 어렵다 보니 최근 일부 젊은 의사들은 까다로운 수술을 회피하고 이식형 보청기를 바로 시술하곤 합니다. 그럴 경우 환자가 들을 수 있게 되긴 하지만, 언제든지 새로운 제품울 시도할 수 있는 삽입형 보청기와 달리 생활하는데 불편하고 삶의 질이 떨어질 수 있지요. 보청기에 의존하지 않고 청력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차단되고요. 의료 윤리적인 면에서 좀 더 신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선오 교수의 말에서 새로운 기기와 치료 기술을 시도하여 경력에 보태려 하기 보다는 환자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대가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장선오 교수는 의사들이 환자를 자신의 새로운 케이스나 실적으로 대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며,“환자가 내 가족이라면 어떻게 치료할까를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한다”고 말한다. 정상적인 귀를 갖지 못한 채 태어나는 아이, 듣는 능력이 없는 아이의 치료를 맡겨야 하는 부모들이 의사들에게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이 아닐까.
대가의 발자취, 후진들에게 값진 자양분이 되다.
진료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연구 영역에서도 장선오 교수가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장 교수가 펴낸 논문들이 현재 우리나라 청각학과 ERP(Event-Related Potential: 사건관련전위) 연구 분야에서 값진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장선오 교수가 1980년대 미국 커네티컷 대학병원(University of Connecticut Health Center) 청각생리실에 연구원 자격으로 2년간 머물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처음 그곳에 가서 보니 청각세포 하나 하나의 생리, 신경 섬유 하나의 특징까지 측정하고 연구하고 있더라고요. 당시 우리나라는 청각 생리 분야의 연구가 취약했던 터라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이후 국내에 돌아온 장선오 교수는 다양한 연구를 이끌어 논문으로 발표하고, 학회를 결성하며 국내 청각학연구 분야의 토양을 다졌다. 국내에 처음으로 달팽이관의 외유모 세포에서 발생하는 소리 에너지를 측정하는 이음향방사 측정을 도입한 것도 일례다.
이처럼 장선오 교수가 평생에 걸쳐 만들고 다져온 길이 현재 후진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장선오 교수님께서 연구하신 내용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청각학 분야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이는 제가 연구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장선오 교수님은 탁월한 술기를 지니시고, 질환 별로 다양한 수술기법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그 가르침은 제가 지금도 환자를 수술하는데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이런 경우에 장선오 교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서울대학 병원에서 지도를 받고 현재 서울의 대형병원 이비인후과에 몸 담고 있는 어느 교수의 말이다.
“후학을 양성하시는 데 열정을 쏟고, 환자뿐만 아니라 전공의와 학생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 역시 닮고 싶은 부분”이라고 덧붙이는 그의 말을 통해 장선오 교수의 그간의 노력이 후배와 제자들에게 값진 자양분이자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선오 교수에게 그가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고, 지금도 진료를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좋은 스승, 좋은 선배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제게는 행운이었고, 그들보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지금에 이른 것 같습니다. 주변 여건도 제가 잘 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고요.” 주변에 공을 돌리는 그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저한테 주어진 재능을 아픈 사람을 돕는 데 활용해야 한다는 믿음 역시 큰 힘이 되었고요.”
‘귀(耳) 한 사람’, ‘귀(貴)한 사람’이 되다.
장선오 교수가 돕고 싶은 ‘아픈 사람’은 그에게 진료 예약을 하고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이 다가 아니다. 그는 캄보디아 헤브론 병원을 방문하여 의료 봉사를 해오고 있기도 하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헤브론 병원은 우리나라의 의사 출신 선교사들이 빈곤 때문에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현지 환자들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뜻을 모아 설립한 병원이다.
장선오 교수는 병원 설립 당시부터 7년째 헤브론 병원을 방문하여 진료와 수술을 해오고 있으며, 의료 장비가 턱없이 부족한 헤브론 병원을 위하여 국내 병원에서 쓰지 않는 의료 장비를 모아 보내 주고 있기도 하다. 서울대학 병원에서 진료하던 시절에는 후원을 받아 캄보디아에서 치료를 받으러 온 어린이 환자를 수술한 적이 있는데, 후원금을 초과해 버린 병원비 수천만원을 앞장서서 충당해 준 적도 있다. 진료와 연구만큼이나 봉사와 실천에 있어서도 대가인 것이다.
장선오 교수는 스스로를 ‘귀한 사람’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귀를 전공했다는 의미에서 ‘귀 한 사람’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농담이지만, 국내에서 귀 질환에 대한 연구 기반과 치료 사례가 일천했던 초창기부터 이 분야에 몸 담고 개척해 온 데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때문일까. 그의 딸 역시 현재 이비인후과 교수로 병원에 재직 중이다. “제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우리 딸까지 ‘귀한 사람’이 되었더라고요.” 장선오 교수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장선오 교수는 국내와 해외 학회를 다니며 직접 찍은 사진들을 여러 장 보여주었다. 단양의 미인암에서부터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인도의 타지마할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전문가가 찍은 듯한 솜씨로 그의 휴대폰에 담겨 있었다. 정년퇴임 후 마음껏 여행을 다니며 좋아하는 사진 찍기에 전념할 수도 있었을 시간을 환자를 진료하고 제자를 키우기 위하여 온전히 다시 내어 놓은 장선오 교수는 진정으로 귀한 의사,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